부모교육

‘사랑’으로 포장된 ‘가스라이팅’… 자녀는 서서히 병든다

고상범 2024. 10. 26. 23:58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란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자신을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정서적 학대를 의미합니다. 심리학 용어로 ‘가스등(Gas Light)’이라는 1938년 작 연극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연극에서 남편은 집안의 가스등을 일부러 어둡게 만듭니다. 이후 집안이 어두워졌다고 말하는 부인이 잘못된 거라며 계속해서 부인을 탓합니다. 이에 부인은 처음엔 자신이 잘못 본 것으로 생각하다가, 계속해서 자신이 잘못됐다는 남편의 부정적 소리에 점차 자기 자신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고 믿어 버립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의심한 후엔 결국 판단력이 흐려져 현실인지 능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처럼 계속해서 상대에게 부정을 심어줘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게 만들고 판단력을 잃어버리게 함으로써 정신을 황폐화하는 행위가 미국의 심리학자 로빈 스턴이 이론화한 가스라이팅입니다.

이처럼 가스라이팅을 당하면 서서히 자신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우울과 좌절에 빠져 마침내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 속에 견딜 수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결국, 삶에 대한 의미와 목적을 완전히 상실하고 정신적으로 서서히 병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가스라이팅 증상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다음세대에게서 너무나도 정확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성세대들이 살아온 환경보다 훨씬 편안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지만, 청소년들의 정신건강은 위험수위에 다다랐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두려움과 불안함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잉행동장애 반항장애 우울증 틱장애 수면장애 불안장애 거식증 폭식증 등 이전에는 개념조차 없던 다양한 정신질환이 나타나고 그 비율은 매년 놀라운 속도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의 원인은 대부분 자녀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 원인은 부모로부터 시작됩니다. 내 자녀가 가스라이팅으로 인해 신음하고 있다면 바로 부모인 내가 자녀에게 지속적인 가스라이팅을 범하는 가스라이터(gaslighter)라는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가스라이팅 가해자들에게 왜 그런 말과 행동을 했는지 물으면 그들은 모두 같은 대답을 합니다. 자신이 대상자를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과 행동이었다고 답합니다.

이제는 부모인 내가 자녀를 향해 쏟은 수많은 말과 행동과 태도가 진정한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사랑으로 포장된 가스라이팅은 아니었는지 냉정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이 시대의 부모들이 자녀에게 범하는 여러 가스라이팅 유형 가운데 첫 번째 ‘완벽주의 가스라이팅’부터 알아보고자 합니다.

완벽주의 가스라이팅은 부모의 완벽주의로부터 시작됩니다. 부모가 사사건건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은 자녀를 향해 부정적인 말을 폭포수처럼 쏟아냄으로써 자녀의 정신과 영혼을 혼란하게 만듭니다. 정작 부모 자신은 완벽하지 않으면서 자녀에 대해서만큼은 철두철미한 완벽주의자가 되려 합니다. 이런 부모는 자녀에게 “너는 왜 그것밖에 못 하니” “내가 너를 어떻게 믿니” “네가 그럼 그렇지” 등등 매사에 부정의 말을 쏟아냅니다.

생각보다 많은 부모가 이런 완벽주의 가스라이팅을 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일단 자녀가 설거지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상상을 해 보면 좋습니다. 자녀가 설거지하는데 물이 사방으로 튀고 생각 없이 그릇을 쌓아놓아 금방이라도 깨트릴 것만 같은 서투른 모습을 보면 어떤가요. 차라리 내가 고무장갑을 끼고 싶은 마음이 들거나 “차라리 네가 가만히 있는 게 나를 도와주는 거다”라는 잔소리가 나온다면 그게 바로 완벽주의 가스라이팅입니다.

설거지처럼 사소한 일에서도 부모가 완벽주의에 해당하는 기준으로 자녀에게 부정적인 시선과 불안한 마음을 전달하며 아이의 자존감을 땅에 떨어트리는데 하물며 자녀가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인생의 문제들 속에서는 어떻겠습니까.

완벽주의 가스라이팅을 멈추기 위해서는 부모의 깨달음이 먼저입니다. 다음세대가 반드시 겪는 10대 시절이 실수하고 실패하면서 더욱 단단해지고 그럼으로써 건강하게 성장하는 시기라는 것을 부모가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이 10대에 걸맞게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녀의 개성과 타고난 유전자, 부모의 조건과 성장 환경 등 여러 가지 처한 상황에 따라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의 그릇이 있다는 것을 존중하는 부모가 돼야 합니다. 자녀가 부모의 기준에 맞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는 말씀을 떠올려야 합니다. 자녀의 부족함을 감싸주고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가르치는 부모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서대천 목사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50101&code=23111413&sid1=mco